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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얀 안개꽃 - 1 1. 비가 오던 10월의 어느 날. 길에서 한 여자가 웅크려 앉아 서럽게 울고 있다. 몇 시간 전까지 연인의 품에서 환하게 웃던 그 여자는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반쯤 넋이 나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.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저 그 남자의 마음이 왜 변했는지에 대한 의문만 가득하다. ‘오늘 같이 먹었던 음식이 마음에 안 들었나? 같이 갔던 카페가 별로였나? 아 그러고 보니 눈썹 이상하게 그려졌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었나? 오늘 옷이 이상했나? 이런 옷 싫다고 했던 거 같긴 한데. 아까 키스할 때 입 냄새가 났었나? 가글 잘했는데 역시 이 닦았어야 했었나? 그러고 보니 요새 많이 힘들다고 했는데 그 일을 좀 더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으려나?’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지만, 그녀는 .. 더보기
그 남자의 하루 - 4 그가 도서관에 들어가서 맨 처음 하는 일은 자신이 빌린 책을 반납하는 것이다. 열람실은 2층과 3층에 있고 책의 반납은 책이 원래 있던 층의 열람실에서 해야 한다. 층과 층 사이를 엘리베이터를 타도 되고 계단을 이용해도 되지만 그는 여러 매체에서 영향을 받아 건강을 위해 계단을 이용한다. 계단은 총 34개로 중간 층까지 가기 위해 17계단, 그리고 나머지를 올라가기 위해 17계단을 걸어야 한다. 문득, 그는 계단 사이의 층을 보며 그곳이 붕 떠있는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. 2층도 아니고 3층도 아닌 그곳. 그저 오르는 방향을 바꾸기 위해 존재하는 그곳. 효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곳. 과거 재미있게 읽었던 판타지 소설에서는 9와 3/4승강장이라는 환상의 공간을 통해 신비의.. 더보기
섬 - 3 3. 다음 날 아침, 재혁은 눈이 조금 늦은 시간에 떠졌다. 어제 새벽 4시에 깨서 그렇다고 재혁은 생각했다.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니 오전 10시. 방에 있는 한 뼘 남짓한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방안 전체을 밝히지 못한 채 자신이 비추는 자리만 맴돌았다. 급작스럽게 느껴지는 갈증을 참지 못하고 재혁은 방은 나섰다. 방문을 열고 나가니 거실에서 재혁의 어머니가 구부정한 모습으로 마늘 대를 자르고 계셨다. 날이 잘 선 가위로 서걱서걱 마늘 대를 자르는 어머니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갑자기 어머니가 아닌 다른 낯선 사람이라고 느껴졌다. “어머니 저 일어났어요.” “아고 우리 아들 일어났네잉. 배가 고롱거리제? 잠만 기다리라. 음마가 빨리 밥 맹글러줄게.” 아들을 보고 만면을 .. 더보기